마을안내

별 흐르는 마을 청수리

연혁

청수리마을의 유래와 지나온 발자취

 

설촌 유래

청수리는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약 45㎞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동쪽은 저지리, 서쪽은 조수리, 남쪽은 산양리와 접해 있다.
청수리는 360여 년 전 ‘흙속물’(또는 흑성물, 설물, 국립지리원의 5,000분의 1 지도에 ‘흙삭물로 표기되어 있다)일대에 청주좌씨(淸州左氏)가 들어와 살았고, 270여년 전에 제주고씨(濟州高氏)와 진주강씨(晋州姜氏)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청수리의 옛 이름은 ‘널ᄆᆞᄅᆞ’, ‘널ᄆᆞ름’ 또는 ‘청수물’이다. 『탐라지』(제주목, 과원)와 『남환박물』(지과) 등에 ‘판지(板旨: 널ᄆᆞᄅᆞ)’, 17세기 「탐라도」와 18세기 초 「탐라지도」와 「제주삼읍도총지도」, 『해동지도』(「제주삼현도」) 등에 ‘板舍果園(판사: 널ᄆᆞᄅᆞ과원•널ᄆᆞ름과원)’, 『제주읍지』(대정현지, 도로)와 「제주삼읍전도」(구우면), 『제주군읍지』(「제주지도」) 등에 ‘淸水里(청수리: 청수ᄆᆞ을)’, 「감시절목」(1826)에 淸水(청수), 일제강점기 때의 5만분의 1 지도에 ‘淸水里, 大洞(대동: 큰골), 之去屹(지거흘), 水龍(수룡: 수룡이)’ 등으로 표기되었다.
『삼군호구가간총책』(제주군, 구우면)에는 “‘청수’의 연가는 111호이다. 남자 250명과 여자 281명을 합하여 531명이다. 기와집 6칸과 초가 270칸을 합하여 276칸이다(淸水, 烟家一百十一戶, 男二百五十口, 女二百八十一口, 合五百三十一口, 瓦家六間, 草家二百七十間, 合二百七十六間).”라고 하였다.
청수(淸水)는 민간에 남아 있는 ‘청숫물’이라는 음성형으로 볼 때, ‘청수’의 음독자 표기일 수도 있고, 한자의 뜻 그대로 ‘ᄆᆞᆰ은 믈〉맑은 물’의 훈독자 표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음성형은 민간에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단 ‘청수’의 음독자 표기로 보아둔다.
한편 청수리에는 ‘널ᄆᆞᄅᆞ〉널ᄆᆞ르’ 또는 ‘널ᄆᆞᄅᆞᆷ〉널ᄆᆞ름’이라는 등성이가 있는데, 이곳에 옛날 과원이 있었다. “‘널ᄆᆞᄅᆞ’는 제주 서쪽 73리에 있다(板旨, 在州西七三里).” 『탐라지』(제주목, 과원). 널ᄆᆞ름과원[板舍園] 『탐라지초본』(제주목, 과원). 그런데 한자 표기로 板旨(판지)또는 板舍(판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널ᄆᆞᄅᆞ〉널ᄆᆞ르’가 원래의 음성형인 것 같고, ‘널ᄆᆞᄅᆞᆷ〉널ᄆᆞᆯ음〉널말음’은 이의 변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板旨이고, 후자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板舍가 된다. 板은 ‘널’(널 爲板<훈민-원, 해례:25>)의 훈가자 표기, 旨는 ‘ᄆᆞᄅᆞ(旨 ᄆᆞᄅᆞ 지<신합, 하:59>)〉ᄆᆞ르〉마루’의 훈독자 표기, 舍는 ‘ᄆᆞᄅᆞᆷ(舍音洞 ᄆᆞᄅᆞᇝ골<용가, 5:34>)〉ᄆᆞ음>ᄆᆞ름’의 훈가자 표기이다. ‘널ᄆᆞᄅᆞ>널ᄆᆞ르’는 ‘넓은 등성이’를 뜻한다.淸水里(청수리)는 樂泉(낙천) 동쪽, 造水(조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18세기 후반에 淸水里(『제주읍지』 대정현지, 도로)가 보이나, 독립된 행정마을로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후반까지는 행정상 楮旨里(저지리)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초반부터 독립된 행정마을이 되었다. 淸水는 한자의 뜻 그대로 ‘맑고 깨끗한 물’이라는 데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청수리 본동은 일제강점기 때 大洞(대동)으로 표기되었다. ‘지거흘’ 일대는 한자차용표기로 之去屹(지거흘) 또는 池巨屹(지거흘) 등으로 표기되었는데, 제주4·3사건이 끝난 뒤인 1950년대부터 평화동(平和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가메오롬’에 평화박물관이 들어서 있다.‘지거흘‧지거을’은 ‘가메오롬’ 동쪽에 있다. ‘지거’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 ‘흘’은 숲 또는 숲으로 된 언덕 따위를 이르는 제주어이다. ‘수룡이’는 한자로 水龍(수룡)으로 표기되었는데, 지금은 ‘수룡동’이라 하고 있다.
2007년 11월 현재 청수리는 ‘본동’과 ‘평화동’, ‘신연동’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본동’은 청수리 중심마을이다. ‘평화동(平和洞)’은 본동 남동쪽에 있는데, 옛 ‘지거흘’(또는 ‘지거을’, 또는 ‘흘못’, 지거동)과 ‘너버흘’(너버을, 廣屹洞)을 포함한 마을이다. 본동과 평화동 상이 ‘빌레왓’ 일대를 ‘신연동(新連洞)’이라 한다. ‘평화동’ 사람들은 제주 4·3사건 소개 후 복구 과정에서 청수리에 성담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에 출입문에 초소를 설치하여 청수리 주민, 저지리 주민, 산양리 주민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 후 저지리와 산양리가 마을을 재건하고 주민이 복귀한 뒤 맨 마지막으로 ‘지거동’, ‘광흘동’, ‘신연동’ 등을 재건하였다. 그때 당시 한림면장 김창우가 주택재건용 목재를 지원하기 위해 방문하였다가, 지역 주민의 새로운 동명 요청을 받아들여 4·3사건 소개 후 제주도에서 맨 마지막으로 평화를 찾았다는 의미로 ‘평화동’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때 사용하였던 ‘정인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버스노선 변경 신청을 할 때 ‘정인동’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을 하였기 때문에, 행정상 ‘정인동’이라 한 것이었다. 지금은 주민총의에 의해서 원래의 동네 이름인 ‘평화동’으로 의결하였기에 ‘정인동’이라는 이름은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청수리 마을은

제주 생태계의 보고인 곶자왈 지역으로 다양한 야생식물과 야생화가 자생하고 있는 곳, 운문산 반딧불이의 최대 서식지인 청수리 마을은 청정한 환경을 지키고자 마을의 자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맑고 깨끗한 물’이라는데서 붙여진 청수리는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약45km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입니다. 북쪽은 한림읍, 서쪽은 낙천리, 남쪽은 산양리로 에워 싸여 있으며, 65만평의 광활한 목장과 32km의 감귤수출 단지가 있습니다.
친환경 농업경영과 곶자왈 보전 등 환경오염을 걱정하고 자연보호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농산물과 깨끗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며, 최근에는 이러한 자연자원과 역사문화자원을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농촌체험관광의 메카로 거듭나 도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2016

행복마을만들기 전국대회 동상 수상

ICT 창조마을 시범사업 선정

2013

자연생태 우수마을 지정

웃뜨르 권역 우수권역 선정(장관상 수상)

2012

대한민국농어촌마을대상 장관상 수상

농어촌여름휴가페스티벌 참가(~2015년)

2011

제주형 지역공동체 사업 선정(착한먹거리 사업)

농임수산식품부 주관 농어촌축제지원사업 선정

농어촌체험, 휴양마을사업자 선정

Rural-20 선정(농림수산식품부)

2010

전국 최우수 권역 선정(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 수상)

2007

웃뜨르 권역 농촌종합개발말을사업 추진(~2013년)

녹생농촌마을 지정, 웃뜨르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 대상지 선정